요새 큰아이의 학교과제 중 민주주의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발표하는 과제가 있어 함께 보게 된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있어서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줄거리
때는 1980년 광주, 택시 운전을 하면서 부모없이 남동생을 뒷바라지하며 살고 있는 주인공 강민우(김상경)가 있습니다. 민우는 동생 진우가 다니는 성당의 누나인 신애(이요원)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민우는 진우를 미끼로 신애와 시내극장에서 영화를 같이 보기로 약속하고 영화를 보던 중 갑자기 매캐한 최루가스가 극장에 퍼지더니 한 대학생이 들어오고 그를 쫓아 온 군인들의 폭행을 목격합니다. 극장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밖으로 뛰어 나가고 길거리에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군인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동생 진우의 같은 반 친구인 상필이 계엄군에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해서 그만 사망하고 맙니다. 진우는 상필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고 이를 계기로 전교생을 이끌고 시위에 가담하려고 합니다. 동생이 시위에 가담하려는 것을 알게된 민우는 동생이 걱정되어 말려보지만 진우는 듣지 않습니다.. 시위 중 전남지사가 헬리방송으로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방송을 하고 시민들은 환호하며 기다리지만 군인들은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하게 됩니다. 동생 진우도 총에 맞고 그만 사망하게 되고 민우는 큰 실의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특전사 예비역대령으로 예편후에 민우가 일하고 있는 택시회사의 사장인 박흥수는 계엄군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고 시민군에 합류하여 무기 사용법등을 알려주면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시민군들은 경찰서를 털어 무장을 하고 도청에서 철수한 계엄군 대신 도청을 접수합니다. 민우는 도청 옥상에 올라가 국기위에 검은 리본을 묶고 조기를 올립니다. 택시회사의 사장인 박흥수는 민우가 사랑하는 여인 신애의 아버지입니다. 박흥수는 민우에게 신애와 같이 도청을 나가서 자신의 딸을 지켜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민우는 다시 돌아와 박흥수사장과 함께 하기로 합니다. 치열한 도청작전 중에 박대장은 민우에게 뒤로 나가서 돌아가라며 문을 잠가 버립니다. 민우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가게 되고 박흥수 대장은 계엄군의 총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민우는 빠져나오지만 결국 계엄군에게 포위 되었고 그들이 폭도라고 말하자 그만 분노하며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며 절규하고 총에 맞아 사망하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의 배경
5.18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대해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럼 광주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배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격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같은해 전두환 등 군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전두환은 80년 초부터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4월14일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돼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1980년 5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벌어지게 되었고 국회는 계엄 해제와 개헌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려 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고 정치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보도검열 강화 같은 조치를 내렸습니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을 구금하였고 국회를 봉쇄하였습니다..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신군부는 부마항쟁 때처럼 강경진압하면 잠잠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공수부대를 동원해 진압하였습니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대원들이 시위하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살상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 시민들은 분노를 느끼게 되었고, 어른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에서 집단 발포를 하였고 외곽도로 봉쇄 작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차량통행자나 지역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5월 27일 계엄군은 시민군과의 총격 끝에 도청을 점령하며 광주 민주화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전두환
전두환은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나 대구에 55세 때 이주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진입대하여 참전하였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방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516 쿠데타 직후에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고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천하였습니다. 1979년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12.12사태를 일으켜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뒤 그해 6월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이 되었습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8월부터 사회악 일소를 목표로 삼청계획 5호를 시행하여 많은 사람을 강제로 연행하였고, 삼청교육대 입소등의 처분을 하는등 인권탄압을 벌였습니다. 8월 5일 대장으로 셀프진급하고, 22일 예편하는데 이는 최규하 대통령의 후임이 되기 위한 요식행위였습니다.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는데 이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간접선거 방식으로 진행되어 일명 체육관 선거로 불립니다. 그는 정당성이 없는 정권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자 3S정책을 펼친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스크린,섹스,스포츠의 3S정책을 통해 야구, 축구등의, 프로리그가 출범하였고 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 86년에는 아시안게임을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전두화정권은 대학에 학생들의 상주시키며 감시 및 체포하였고 집시법등을 만들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여 ‘부림사건’등의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부림사건’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를 맡았던 사건으로 영화 ‘변호인’에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80년 7월 김대중이 북의 사주를 받고 내란을 도모했다고 조작해 사형을 선고했다가 국제사회의 반발에 미국으로 추방시켰고 야당의 정부견제 기능을 박탈시키다시피 했습니다. 이에 항의해 김영삼은 단식투쟁을 벌이며 무도한 전두환정권에 항거하고 있었습니다. 87년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언론에 알려지고 많은 국민이 집회를 하며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여야 개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4.13호헌조치를 선언해 버립니다.. 이는 6월 민주항쟁의 단초가 되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골자로 하는 시국 수습 방안인 6.29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고, 전두환은 이듬해 2월 퇴임하였습니다. 88년 11월 5공화국비리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청문회가 열리자 백담사에 들어가 2년간 칩거하였습니다. 97년 군사발날가담, 뇌물 수수등으로 기소되어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2,205억 원이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12월 사면되며 징역은 면하였으나 추징금은 아직도 완납하지 않았습니다. 2021년 11월 29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전두환은 자신의 잘못을 끝내 사과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그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인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라는 대사가 아직도 가슴을 울립니다.